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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1940년 5~6월 프랑스는 어떻게 한 달 만에 패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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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06. 12. 17:29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강성학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1940년 5월 10일 윈스턴 처칠이 마침내 대영제국의 수상으로 임명되던 바로 그날 프랑스는 독일군의 전격전(Blitzkrieg)의 기습적인 침공을 받았다. 그것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작전의 대규모 재현이었다. 또다시 아무런 경고 없이 비교적 청명한 날씨에 히틀러는 인접국들을 공격했다. 그날 히틀러는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그리고 벨기에를 동시에 침공했다. 이런 절박한 위험 속에 수상이 된 처칠은 13일에 오직 7분간 계속된 그의 수상으로서 첫 연설에서 자기는 "'피와 노고, 눈물 그리고 땀' 외에는 제공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처칠은 히틀러에 단호히 맞섰다.

그러나 프랑스는 독일 공군과 전차에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청천하늘의 날벼락 같은 아무도 예상 못한 놀라운 이변이었다. 5월 14일 저녁에 독일인들이 벨기에 국경선의 아르덴(Ardennes)의 스당(Sedan)에서 프랑스 방어선을 뚫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프랑스의 폴 레노(Paul Reynaud) 수상은 보다 많은 영국의 전투기들을 즉시 파견해달라고 처칠 수상에게 긴급히 요청했다. 다음 날 오전 7시 30분 레노 수상은 처칠에게 전화를 걸어 독일의 기갑부대가 스당을 돌파하고 파리로 가는 길을 열었다며 수도 파리를 구원하기 위해 영국의 전투기들이 필사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패전을 직면하고 있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하는 파리평화회의에서 모든 대표단들은 유럽과 세계에서 항구적인 평화를 확실하게 할 조건을 부여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하는 역사상 최초의 집단안전보장 제도인 국제연맹을 창설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유럽의 강대국들은 여전히 그들의 전통적인 힘의 균형정책을 온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은 독일 대신에 프랑스가 유럽대륙에서 강자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특히 프랑스의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 수상은 군사적 및 경제적으로 독일을 약화시키는 타결을 열심히 몰아붙였다. 프랑스인들은 이것만이 서유럽에서 평화를 확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첫째, 오랜 분쟁 대상인 알자스-로랭 지역을 되돌려 받았다. 그곳은 1870~1871년 프랑스와 프러시아 간의 재앙적 전쟁에서 독일에 패배할 때까지 프랑스 땅이었다. 둘째, 명백히 독일 땅으로 로랭과 독일의 라인란트(Rhineland) 사이에 있는 풍부한 자르(Saar) 탄광이 전쟁 중 프랑스 북부 탄광들에 가해진 손해에 대한 배상으로 15년 동안 프랑스 손에 넘겨졌다. 그곳의 미래는 1935년 자르 주민들의 국민투표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셋째, 프랑스인들은 라인강(the River Rhine)이 프랑스와 독일 간의 새 국경선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의 반대로 동맹국들의 합동군사 점령하에 비무장 지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1926년 영국군이 철수했고 프랑스도 1930년에 떠났다. 넷째, 독일은 대량의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독일이 배상금을 체납하자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가 병력을 파견하여 라인강의 우측 뱅크에 있는, 독일 산업의 대부분이 소재하고 있는 루르(Ruhr) 탄광을 점령했다.

이처럼 프랑스의 외교정책은 독일이 다시 강대국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1926년 독일의 구스타프 스트레제만(Gustav Stresemann)과 프랑스의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이 양국의 우호증진을 위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가 1927년과 1934년 사이에 독일 전선에 난공불락으로 가정된 마지노 라인(Maginot Line)이라는 요새 라인의 구축을 멈추지 못했다. 또한 그것은 프랑스가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국가들과 우호적인 동맹의 체결을 막지 못했다.
1921년 프랑스는 폴란드와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는 합의에 이르렀다. 1925년 로카르노 조약(the Locarno Pact)은 벨기에와 독일의 국경선을 보장했다. 1935년에 체결된 슈트레사 프론트(Stresa Front)는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이 히틀러에 대항하여 취할 공동행동에 대한 합의였다. 다른 조약들이 러시아와 체결되었으며 작은 협상국들(Little Entente)이라고 불리던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와 조약체결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소위 프랑스 체제(the French System)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포괄적이고 막강한 프랑스의 안전보장망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침공한 뒤 한 달도 안 되어 독일에 완전히 패망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1918년과 1940년 사이에 프랑스는 20명의 다른 수상이 이끄는 44개 이상의 다른 정부를 가졌다. 같은 기간 러시아에는 오직 2명, 그리고 미국에선 5명의 지도자들이 있었을 뿐이다. 프랑스의 정치적 문제는 정당들이 너무나 많은 데 있었다. 한때는 19개 정당이 국회 안에 있었다. 그 결과 모든 정부는 여러 상이한 정당의 연립정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지배적 정당들이 우익이면 그들은 중도의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했다. 좌익 정당들도 그들이 정부를 구성하려면 마찬가지였다. 이 연립집단들은 우익인 '국민통합'이나 좌익을 대변하는 '좌파연합'과 같은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런 정당들의 구성원들이 쉽게 분열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연립정부가 끊임없이 수립되었다. 프랑스의 비극은 이 회전문같이 연속되는 정부들이 프랑스 정부에 아무런 안정성을 가져다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일관된 외교정책을 결코 유지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좌익과 우익 간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져서 그들은 한편의 파시스트 조직들과 다른 한편의 공산당이라는 두 개의 극단적 세력으로 벌어지게 된 것이다. 1934년 러시아 태생의 기업가 세르게 스타비스키(Serge Stavisky)가 재정적 불법거래로 프랑스 경찰에 의해 체포되기 전에 자살하자 그 후 조사가 프랑스 정계의 수많은 정치적 거물들에게 의혹을 품게 했다. 이에 강력히 항의하는 데모와 파업들이 발생하자 정부가 무너졌다. 왜냐하면 소요가 내란으로 치달을 수 있는 아주 진정한 위험성이 있다고 관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에 정치적으로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그 사건으로 인해서 전 정치체제가 오명을 쓰고 많은 프랑스인들이 민주주의의 장점을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강력하고 정직한 정부를 제공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에는 1918년부터 1940년 5월 10일까지 프랑스의 안전을 도모한 베르사유 체제와 프랑스 안보체제를 지키기 위해 히틀러의 독일에 대해 선제공격을 단행할 만큼 강력한 정부나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1940년 5월 10일, 히틀러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룩셈부르크를 대규모로 침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전쟁을 개시했다. 그에 따라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벨기에의 군대를 돕기 위해 급히 파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독일의 주력 공격군은 벨기에 대신에 현대 탱크전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프랑스인들이 가정했던 벨기에 남부에 있는 어려운 산악지역인 아르덴을 통해 공격했다. 그곳이 탱크전에 부적합하다는 프랑스 군부의 가정이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독일 전차들은 약화된 프랑스 군대를 일시에 휩쓸었으며 해협의 해안을 향해 질주했다. 10일 후에 폰 클라이스트(von Kleist)장군이 이끄는 전차들이 바다에 다다랐다. 그 결과 연합국 군대들을 북쪽으로 격리시켰다. 다행히도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파리로 진격하는 원래의 계획을 유지하도록 고집했고 그 결과 독일 공격으로 함정에 빠진 이곳저곳의 저항의 포겟들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나중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만일 독일인들이 계속해서 공격했다면 그들은 확실히 프랑스 땅에서 영국의 원정군을 파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약 40만명에 달하는 영국과 프랑스 군인들이 함정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프랑스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해군은 거의 1000척에 달하는 모든 형태와 크기의 선박들을 모아 됭케르크 항구로부터 신속한 철수를 조직하고 수행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약 25만명의 영국 병사들과 10만명이 넘는 프랑스와 벨기에 군인들을 영국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영국에게 대규모의 패배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으로 희생이 적었다. 살아 돌아온 군인들은 이제 다른 전투에 참가할 것이다. 성공적 철수 직후 처칠은 그들이 항복하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싸울 것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그 연설로 인해 당시 됭케르크의 철수작전이 마치 승리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됭케르크 이후 독일의 진격에 저항할 수 있는 군대가 별로 없었다. 6월 10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을 포고했다. 6월 14일 독일의 병사들이 행군으로 파리에 입성했고 6월 21일 프랑스 정부는 항복했다. 점령되지 않은 프랑스는 중부 프랑스에 있는 비시(Vishy)라는 작은 마을에서 페탕(Petain)과 라발(Laval)이 패전의 괴뢰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영국으로 도주한 샤를 드골 프랑스 장군은 다른 생각을 갖고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 정부'를 선포했다. 드골은 패망한 프랑스의 어둠 속에서 비친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프랑스는 완전히 패망했다. "프랑스 전투"는 끝이 났고 이제 "영국의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이라는 암호명하에 영국을 침공할 대규모 공습 계획을 준비했고 실행했다. 그 영국전투에서는 영국공군이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처칠은 영국공군에게 "인간의 갈등 분야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적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은 신세를 진 적은 결코 없었다"는 유명한 헌사를 보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이제 히틀러의 점령 치하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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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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