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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호흡을 맞췄던 선배 기자 중 한 명은 심심할 때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를 이렇게 표현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패싸움이 뉴스에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군대를 다녀오니 외국인들이 너무 많아져 외국 도시 같았다.','한때는 범죄영화에 단골 소재였다.'
그가 말한 동네. 바로 서울 구로동이다. 나랑 10년 이상 차이 나는 선배의 얘기지만 쉽게 수긍이 되지 않았다. 물론 예전에는 '공단', '우범지대'라는 이미지가 짙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그 동네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중국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으며, 서울 시내나 인천·지방을 가기에 용이한 교통의 중심지로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선배와 나의 생각의 격차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일단 시간 순서대로 무슨 일이 벌어졌나 따져보기로 했다. 그의 말처럼 한때 구로동은 부정적 이미지가 많았다. 가출 청소년들이 주로 숙박을 해결했다는 '벌집촌', 미세먼지를 마음껏 뿜어냈던 공장들.
구로동엔 2000년대 벤처 열풍과 함께 IT기업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모이니 패션몰들이 들어섰으며, 음식점들도 생겼다. 마지막으로 넷마블과 코웨이가 들어서면서 기존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씻을 수 있었다.
화룡점정. 용을 그린 그림에 이들 회사는 눈동자였다.
왜 방준혁 넷마블·코웨이 의장은 구로동에 터를 잡았을까. 대충 짐작이 간다. 땅값이 저렴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방 의장은 1968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환경 탓일까. 그는 생활 터전이었던 가리봉동을 28년 만에 떠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흙수저에서 금수저. 개천에서의 용인 셈이다.
하지만 성공을 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잃은 것도 많지만 강한 생명력, 강한 열망을 얻게 된 측면도 있다"고 한다. 특히 방 의장은 "구로 신사옥을 통해 낙후된 구로의 인프라를 개선하고 지역 주민들과 성장의 과실을 공유할 것"이라고도 밝힌 바 있다.
그가 꿈꾸고 실행한 구로 사옥은 단순히 개인의 열망과 희망으로 보기엔 너무나 커졌다. 구로구의 이미지를 바꿔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선택을 '선한 영향력'이라고 표현한다. 모쪼록 이런 선한 영향력이 좀 더 나왔으면 한다. 흙수저뿐만 아니라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방 의장 같은 결정에 환호할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