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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어머니의 꿈, 아들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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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5. 08. 06:00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 에세이
박주선 회장(1)
먼동이 터오는 이른 새벽이다. 문득,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에게 어머니는 동녁 하늘에 떠 있는 해와 같은 분이다. 불가(佛家)의 일광보살(日光菩薩)을 연상시키는 분이다. 며칠 전 친구 두 명과 막걸리를 마시다가 한 친구가 내 어머니를 애기하는 바람에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는데, "이 친구는 아직도 어머니 애기만 나오면 울보가 되는구먼. 허나 박 의원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거네"라고 나를 위로해준 적이 있다.

어머니는 끼니를 거를 만큼 몹시 가난한 집으로 17세에 시집을 오셨다. 이후 가족의 생계는 오직 어머니 몫이 돼버렸다. 시력을 잃은 시어머니와 자존심이 강한 시아버지, 자식 두 명을 위해 어머니는 보성에서 화순까지 생선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다니시면서 참으로 고달프게 날품장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동생을 낳은 어머니에게 가족의 생계를 맡긴 뒤 한량처럼 전국을 방랑하며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군복무 하던 삼촌이 휴가 나와서 "이런 처지에서는 애들 교육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어머니께 대책 하나를 간곡하게 제의했다. 시부모는 당분간 고모 집에서 모시도록 요청하고, 나와 동생은 친척집에 있도록 부탁한 뒤 어머니에게 서울로 올라가 식모살이를 몇 년간 하여 봉급을 모아 구멍가게 장사라도 하도록 권유했던 것이다.

결국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당숙모의 소개로 수유리에서 2년 여 동안 식모살이를 했다. 서울로 가시는 어머니 앞에서 "우리도 데리고 가요. 언제 을 거야?"하며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부짖었던 생이별의 순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형제를 떼어놓고 눈물 흘리며 열차 타는 어머니 모습을 생각하니 또 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끝내고 고향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우선 단칸방을 얻으셨다. 나와 동생은 비로소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어 기뻤다.

어머니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비단 장사를 시작하셨다. 비단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보성읍과 면의 마을을 찾아다니며 비단을 팔았다. 당시는 농촌에 돈과 쌀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비단 대금은 주로 잡곡과 보리쌀이었다. 어머니께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실 무렵이면 우리 형제는 동구 밖으로 마중 나갔다. 어머니는 비단 대금으로 받은 곡물을 머리에 이고, 등에 메고, 손에 들고 힘겹게 걸어 오셨는데, 동생과 나는 곡물을 나누어 등에 들쳐 메고서 나르곤 했다.

어머니는 날마다 힘든 장사를 하면서 점심은 굵기 일쑤였고 저녁밥도 건너뛰는 날이 많았다. 어머니는 비단 장사가 힘들어서 더는 계속하지 못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다시 집을 세 얻어 구멍가게와 주막을 열었다. 할머니를 여윈 채 고모 집에 홀로 계시던 할아버지를 모셔 와서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구멍가게외 주막의 수입은 생각했던 것보다 신통치 않았다. 할 수 없이 어머니는 또 다른 장사를 하셨다. 보성읍과 면 소재지의 5일장에서 채소와 잡곡류 등 농산물을 싸게 매입해서 매주 3회 정도 광주의 남광주시장과 대인시장 노점에서 파시곤 했다.

어머니는 5일장에 농산물을 매입하러 가시는 날이면 꼭 미리 막걸리 안주를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면 나는 학교에서 돌아온 뒤, 손님들에게 막걸리 술상을 차려드리곤 했는데, 대다수 손님들은 기특하다며 칭찬을 해주셨지만 일부 손님은 상차림이 변변치 못하다고 꿀밤을 주기도 했다. 어머니가 광주로 나가시는 날에는 밤새도록 농산물을 다듬고 묶은 다음 새벽 2시쯤 손수레에 싣고 20여 리 길인 보성역까지 가서 새벽 4시 5분에 출발하는 광주행 기차에 실어드렸다. 그리고 새벽 6시쯤 집에 돌아와 1시간 정도 눈을 붙인 뒤 10여 리 거리에 있는 학교로 등교했다. 학교 가기 전까지의 새벽잠은 정말 꿀잠이었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 가끔 지각도 했다.

밤에는 등잔불을 켜고 공부했는데, 초저녁인데도 막결리 손님들이 술자리를 빨리 끝내주지 않을 때는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 잉걸불 불빛 옆에서 시험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 또 하나 생생한 기억은, 당시는 통행금지가 새벽 4시에야 해제되던 시기였는데, 보성역전 파출소에서 통금 위반이라며 붙잡아 몇 번인가 기차를 놓치기도 했던 일이다. 뒤늦게 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파출소장님이 이후부터는 특별히 배려해주어 어머니께서는 광주행 열차를 무사히 탈 수 있었다. 지금도 그 파출소장님이 가끔 떠오른다.

인간의 삶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와 불행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어머니는 늘 내가 등교할 때마다 '차 조심'하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당시 시골에는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았으므로 '차 조심'은 굳이 당부하시지 않아도 될 당부였다. 그런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하굣길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 회천면 지서로 순시 가던 보성경찰서장 승용차에 머리를 다쳐 의식을 잃었다. 다행히 병원에 실려 간지 5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말이다. 병원에 있는 동안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라는 의사의 소견에 어머니는 혼절했고, 외갓집에서는 나의 죽음에 대비해서 수의와 관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내가 의식을 되찾자, 나를 끌어안은 어머니께서는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염없이 흐느끼셨다. 돌이켜 생각 해보면 '차 조심' 하라는 어머니 말씀을 흘려들었던 것도 '어머니께 큰 죄를 짓고 불효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후회가 막심하다.

이후 나는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나는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고통이었다. 아들의 교복을 새로 맞취 입혀야 했고, 아들의 교과서도 구입해주어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궁리 끝에 망설이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어머니는 당신의 피를 뽑아 팔아서 아들의 중학교 등록금 1100원을 마련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내가 안 것은 훗날이었다. 1974년 16회 사법시험에 수석합격을 하여 기자들이 취재차 단칸 셋방을 찾아왔을 때 어머니께서 비로소 말씀하시어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학비는 대줄 테니 진학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생님들 께서도 '너 같은 인재가 학업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라며 강하게 권하셔서 광주고교로 진학을 했다. 고교 입학 후, 중학교에 진학한 동생이 내 역할을 대신했고, 나는 남광주역으로 나가서 어머니가 팔러 오신 농산물을 손수레에 신고 남광주시장, 때로는 대인시장까지 날랐다. 교복 차림의 나는 손수레를 앞에서 끌고 어머니는 뒤에서 밀었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등교하곤 했다.

고등학생 시절 이런 일화도 잊을 수 없다. 학업과 연관이 있는 영화를 단체로 관람하곤 했는데, 나는 어머니의 고생을 생각해서 관람료 30~40원이라도 아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영화 관람을 포기하곤했다. 그런데 어느 날 역사 과목을 가르치시던 전용종 은사님께서 '오늘 영화는 칭기즈칸의 일대기를 그린 내용이니깐 꼭 관람하라'고 50원을 주셨던 일이 생각난다. 또 그 무렵에 선병팔 중학교 은사님께서 보내주신 '타고난 왕후장상은 없다. 영웅들의 훈장 뒤에 숨겨진 숨 가쁜 이야기들을 항상 생각하라. 희생하시는 어머니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격려 서신이 나에게 큰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정말로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박주선 회장
어머니와 초등학교 시절의 박주선 형제
고교 시절 몇 분의 은사들께서 '항상 교복을 깨끗하게 입고 다녀서 박주선이는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는데, 어머니께서 그렇게 고생하시면서도 자식에게 궁색한 티를 보이지 않도록 하신 점이 한없이 존경스럽다'라고 말씀 하신 격려도 뇌리를 스친다. 나는 운 좋게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도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그런데 광주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서울대학교 법대에 낙방했다. 나는 크게 낙심하여 학업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나를 엄하게 꾸짓었다.

"너의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려고 내가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아니다. 몇 번이라도 도전해서 합격해라. 나는 네 꿈을 이루는 너를 보고 죽겠다. 그것이 내 꿈이다." 나는 어머니의 응원으로 제수, 삼수 끝에 서울대학교 법대에 입학을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오시어 시장골목 식당에서 500원짜리 밥장사로 나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식당일도 했고, 동생은 중학교를 졸업한 후 학업을 포기하고 철공소에 취업하여 내 뒷바라지를 했다. 동생에게 미안하기 그지 없고 빚진 마음일 뿐이다. 어머니는 식당일 외에도 광고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고, 밤늦게까지 봉투 만드는 일을 하시면서 내가 결혼할때까지 무려 20번 이상이나 셋방을 전전하셨다.

시장골목 식당에서 밥 장사를 할 때였다. 식당 주인들이 번갈아가면서 파출소 경찰관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식당일이 바빠서 어머니 대신 내가 파출소에 식사를 배달하게 되었는데 경찰관 한 분이 반찬이 부실하다며 투정을 했다. 그래서 나는 식사 제공의 부당함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어머니의 식당만은 파출소에 더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한 뒤 어머니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엉엉 울었다. 주위 사람들도 어머니의 택호인 장흥댁을 언급하며 함께 기뻐해주었다. "하늘은 무심하지 않구나. 장흥댁이 그토록 고생을 하더니 하늘이 감동해서 자식에게 저런 영광을 주는구나." 지성감천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어머니는 어렵고 힘들게 장사하면서도 자식만을 위해서 고생하신 것이 아니었다. 걸인들이 달라는 동냥이나 탁발승들이 요청하는 시주를 거절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식사 대접까지 하면서 '목마른 사람에게 준 찬물 한 잔도 공덕이 된다'라며 자식들에게 항상 베풀며 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어머니가 주막을 하실 때였으니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탁주 주조장에서 아침에 한 번 자전거로 술을 배달을 해주었으므로 많이 팔리게되면 전화가 없던 때라서 주문을 못 했다. 하는 수 없이 방과 후에 내가 옆집 자전거를 빌려 타고 주조장에 가서 막걸리를 실어 오곤했다. 나는 키가 작아 자전거 안장에 앉아서 타지 못하고 두 바퀴 사이에 발을 넣어 페달을 밟다가 넘어져서 길바닥에 막걸리를 쏟아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는 가정에서 술을 담가 마시는 일이 흔해서 세무서 밀주 단속반에게 적발되어 고발당한 뒤 검찰청에 소환되어 조세 처벌법 위반으로 벌금처분을 받곤 했다. 검찰의 소환장을 받은 어머니나 마을 분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장래 정의로운 검사가 되어 억울하다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그토록 힘든 고생을 하시면서 한 도 원망도 많았을 텐데 당신의 운명을 한탄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으셨다. 힘든 환경과 고통스러운 역경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버티고 당당하게 이겨내셨다.

어머니의 소망은 오직 단 한 가지뿐이었다. 자식의 반듯한 성장과 입신양명이었다. 어머니는 그런 소망을 염원하면서 당신의 고단하고 신산한 삶을 헤쳐나가신 분이다. 어느 날 아내가 나를 평한일이 있다. "당신 어머니처럼 온갖 고생하시면서 자식을 위해 인생을 바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소? 그렇게 살아오셨으면서도 세상을 원망하거나 탓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없지요. 당신도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 이들을 미워하지 않으니 말이에요. 세상이 더 좋게 바뀌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걸어온 당신의 삶이 자랑스럽기만 해요." 검사 출신인 내가 중상모략으로 4번 구속되고 4번 모두 무죄를 선고받고 난 이후에 했던 아내의 말이다.

실제로 내가 구속되자 내 가족은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고, 돌변한 사회의 냉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구속됐을 때 구치소 안에서 대성통곡을 한 적이 있다. 가족들은 어머니께 나의 구속 사실을 숨긴 채 내가 미국에 장기출장을 갔다고 거짓말로 둘러됐다고 한다. 구치소로 면회 온 아내에게 나는 어머니 근황을 문곤 했다. 어머니께서 소식이 뚝 끊어진 나를 책망하시기도 했다고 아내가 전해주었다. "주선이는 미국 가서 왜 전화 한 통 없느냐?" 결국 나의 구속 사실을 아신 어머니의 충격은 산이 무너지듯 컸다.

2번째 구속 후 무죄 석방 될 즈음 어머니는 정신적 충격 때문에 치매 환자가 되었다. 이후 13년간 치매 환자로 사시다가 병상에서 눈을 감으셨다. 시집온 젊은 날부터 물불 가리지 않고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도록 고생만 하신 어머니가 왜, 어째서 박복한 인생을 살다 가셨는지 하늘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때가 있다. 지금도 어머니께 지은 죄가 너무 커서 가끔 하염없이 눈물만 난다.

'세상의 모든 곳에 신이 존재할 수 없기에 신은 어머니라는 존재를 만드셨다'라는 유태인의 금언처럼, 내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시부모에게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한 자세는 가히 신이라도 하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종친회로부터 '장한 어머니상'을 받는 자리에서 "내가 장한 어머니가 아니라 박주선이가 장한 아들이다"라고 수상 소감을 말씀하신 것처럼, 언제나 자식을 앞세우고 본인은 자식을 위해서 고생만 하셨던 어머니! 이런 내 어머니를 이제는 뵐 수도, 모실 수도 없다니 너무나 슬프다. 어머니가 오늘따라 무척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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