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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가족의 자리에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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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7. 30. 15:45

연극 ‘현관문을 열어라’
예술공간 혜화 ‘블랙캣’ 자체 기획작
8월 9일부터 대학로에서 창작 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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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현관문을 열어라' 연습 장면 / 사진 협동조합 아트컴퍼니 드레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서울 대학로의 소극장 예술공간 혜화에서 또 하나의 창작 실험이 시작된다. 오는 8월 9일부터 17일까지 무대에 오르는 연극 '현관문을 열어라'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고착된 전통적 관계의 경계를 허물고, 동시대적 감각으로 다시 구성된 공동체의 풍경을 무대 위에 펼쳐 보인다. 이 작품은 예술공간 혜화의 민간예술창작지원 프로그램 '블랙캣(Black Cats)'의 2025년 자체 기획작으로, 그 의미와 실험정신 모두에서 주목할 만한 창작 초연작이다.

'블랙캣'은 예술공간 혜화가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운영 중인 연간 창작 프로그램이다. 이름의 유래는 19세기 말 프랑스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었던 전설적인 예술 카바레 '르 샤 누아르(Le Chat Noir)'에서 비롯된다. 이곳은 시인, 극작가, 철학자, 공연 예술가들이 밤마다 모여 창작을 공유하고 토론했던 실험적 공간으로, 당대 예술운동의 구심점이자 도시문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예술공간 혜화는 이 상징적 개념을 오늘날 창작자들의 현실에 맞게 변주하며, '밤마다 검은 고양이들이 출몰하는 창작 카바레'로서의 정체성을 적극 실현하고 있다.

이번 시즌 '블랙캣'은 2025년 6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총 8편의 공연을 선보인다. 그중 유일한 자체 기획작인 '현관문을 열어라'는 단지 라인업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프로그램 전체의 방향성과 실천 철학을 응축해 보여주는 핵심 기획이다. 작품은 '망태 할아버지'라는 한국적인 상징을 중심에 놓고, 가족 해체 이후의 삶의 구조와 그 안에서 여전히 사람들과 연결되려는 존재들의 몸짓을 진지하게 응시한다. 낯익은 전통 속 캐릭터가 던지는 낯선 질문이 이 연극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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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현관문을 열어라' 연습 장면 / 사진 협동조합 아트컴퍼니 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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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현관문을 열어라' 연습 장면 / 사진 협동조합 아트컴퍼니 드레
작품의 배경은 설 명절. 누구에게나 익숙하고 정겨운 '명절'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가장 많은 갈등과 상처가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제사 준비로 분주한 한씨 집안에 갑자기 '망태 할아버지'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눌려 있던 감정의 층위가 하나둘씩 드러난다. 이들이 마주하는 감정은 단지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가족 간의 갈등만이 아니다. 혈연과 호적, 제도적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인연들이 서로를 어떻게 품을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제사라는 의례는 공동체적 행위이자, 동시에 낡은 질서의 은유이기도 하다. '현관문을 열어라'는 그 문을 실제로 열며, 안과 밖, 과거와 현재, 관계와 비관계를 넘나든다.

연출과 대본을 맡은 최수완은 연극 '밤과 잠과 꿈', 'DRIVING LOG'에 이어 뮤지컬 '어쩌다 내가 마법소녀?'(2024 CJ문화재단 STAGE UP 선정작) 등에서 유쾌한 리듬감과 묵직한 주제를 능숙하게 결합해온 창작자다. 그는 인간 존재의 이중성과 공동체 속 개인의 고립감을 미세하게 포착하면서도, 경쾌한 웃음과 따뜻한 유머를 무대로 끌어올리는 균형 잡힌 작법으로 관객과 꾸준히 소통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인물 간의 갈등과 회복, 위장된 침묵과 드러난 진심 사이의 섬세한 감정선을 짚어나갈 예정이다.

무대에는 조은(송수희 역), 이관목(한문태 역), 고다연(이채원 역), 피지융(한우리 역) 등 대학로에서 개성 있는 행보를 이어온 배우들이 함께한다. 이들은 단순한 캐릭터를 넘어 입체적인 인물을 구현하며, 극 안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생생하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블랙캣'이 강조하는 또 하나의 가치는 '지속 가능한 창작 생태계'다. 실험적이고 동료적인 예술을 지지하는 이 플랫폼은 상업적 논리와 제도적 한계에 갇히지 않는 독립적 창작의 필요를 묵묵히 증명해 왔다. 협동조합 아트컴퍼니 드레가 운영하는 예술공간 혜화는 서울형 창작극장으로서의 활동은 물론, 전국 순회 공연 '리드미 시리즈', 문화접근성 강화 프로그램 '신나는 예술여행' 등을 통해 지역과 예술을 잇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단순한 가족극이 아니다. 시대적 균열 속에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식구'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망태 할아버지가 열고 들어온 문은, 실은 지금 우리의 삶에도 열려 있는 문이다. 연극 '현관문을 열어라'는 그 문 앞에서 묻는다. 당신은 지금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느냐고. 그리고 그 대답은, 극장의 어둠 속에 앉은 관객의 마음속에서 시작될 것이다.

[포스터] 예술공간 혜화 기획공연_(연극)현관문을 열어라_2025.08.09-08.17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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